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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 리뷰 (장르 긴장감, 캐릭터 무게, 감독의 분노)

시네씨 2026. 8. 13. 10:27

목차


    극장에서 휴민트를 보고 나오면서 이상하게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류승완 감독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느끼던 그 묵직함이 없었어요. 잘 만든 영화인 건 분명한데, 뭔가 빠진 것 같은 그 기분을 한참 동안 분석했습니다.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이 영화는 제목이 약속한 것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 장르 긴장감을 스스로 지운 영화

    휴민트(HUMINT)란 Human Intelligence의 약자로, 사람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첩보 활동을 뜻합니다. 위성 감청이나 통신 도청처럼 기계가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다른 사람의 신뢰를 얻고, 그 신뢰를 정보로 바꾸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리는 냉혹한 행위입니다. 이 단어가 제목인 영화라면 그 불편함을 정면으로 다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인성이 연기한 조 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보원 최선화를 진심으로 대합니다. 포섭하는 과정에서도 그녀를 실제 사람으로 보고, 목숨을 걸고 구하려 합니다. 첩보 장르의 핵심 긴장감, 즉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오염되어 가는 과정이 처음부터 없는 겁니다.

    공각기동대나 류승완 감독 본인의 전작 베를린을 생각해보면, 스파이는 영웅이 아닙니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살아가는 더럽고 외로운 존재죠. 그 처연함이 관객의 심장을 누르는 겁니다. 그런데 휴민트의 조 과장은 장르적 문법 밖에 처음부터 서 있습니다. 이건 용기 있는 선택이 아니라, 장르가 스스로 약속한 긴장감을 해제해버린 것에 가깝습니다. 제가 극장에서 느낀 위화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HUMINT는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냉혹한 정보 활동 — 그 불편함이 장르의 핵심
    • 조 과장은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 장르적 내적 갈등이 부재
    • 악의 집중: 모든 도덕적 오염이 황치성 한 명에게만 몰려 주인공이 공허해짐
    • JSA(2000), 모가디슈(2021)와 달리 구조적 긴장감 없이 감동으로 직행
    요약: 휴민트라는 제목이 약속한 장르적 불편함을 영화 스스로 처음부터 소거해버려, 주인공의 무게와 내적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문제: 캐릭터 무게가 빠진 박건의 서사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박건이 등장했을 때 저도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카리스마 있는 첫 장면, 차갑고 강력해 보이는 외면 뒤에 감추어진 따뜻함.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그 감정의 결을 너무 훌륭하게 소화해내서, 영화를 보는 동안은 그냥 좋았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나오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박건은 북한 국가보위성 소속 요원입니다. 국가보위성이란 북한 체제 유지를 위해 자국민을 감시하고,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며, 필요에 따라 처형을 집행하는 기관입니다. 그 조직에서 오랜 시간 일한 사람이 사랑 하나로 체제를 이탈한다는 설정이, 영화가 부여한 감정의 깊이로는 설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체제 이탈이나 탈북이 얼마나 무거운 심리적 과정인지는 실제 탈북 경험자들의 증언을 담은 연구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출처: 북한인권정보센터). 세뇌와 충성이 켜켜이 쌓인 사람이 그것을 벗어던지는 건, 멜로드라마적 사랑으로 단숨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영화는 그 무게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잠깐 떠올려봤습니다. 아렌트는 악이 괴물 같은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복종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휴민트는 이 통찰의 정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박건을 순수한 사람으로 만들어 그가 시스템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해왔는지를 지워버리는 방식이죠.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선량함으로 덮어버린 겁니다. 제 경험상 이런 처리 방식은 오히려 영화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립니다.

    요약: 박건의 체제 이탈에 구조적 심리적 무게가 부재하여, 명배우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캐릭터가 납득되지 않는 서사적 공백이 남았습니다.

     

    세 번째 문제: 류승완 감독의 분노는 어디 갔는가

    류승완 감독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건 분노입니다. 부당거래는 권력의 부패에 분노했고, 베테랑은 갑질과 계급에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는 에너지가 됐고, 베테랑은 천만 관객을 끌어모았습니다. 제가 류승완 감독 영화를 꾸준히 챙겨본 이유도 바로 그 선명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휴민트에서는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무엇에 분노하는지가 불분명합니다. 인신 매매? 북한 체제? 정보 기관의 냉혹함? 여러 방향을 동시에 겨누다 보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터지지 않고 전부 미지근해졌습니다. 분노의 과녁이 흐릿하니 관객이 함께 분노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여기에 연출 문법의 문제도 더해집니다. 스플릿 디옵터(split diopter)란 렌즈 반쪽에 근접 촬영용 필터를 붙여 화면의 앞과 뒤를 동시에 선명하게 담는 고전적 촬영 기법입니다. 프리즈 프레임(freeze frame)이란 특정 장면을 정지 화면처럼 멈추는 편집 기법으로, 냉전 시대 스파이 영화에서 즐겨 쓰인 연출 방식입니다. 이런 기법들이 2026년의 현대 첩보 이야기와 결합되면서 폼과 내용이 맞지 않는 어긋남이 생겼습니다. 제가 처음 영화를 볼 때 느낀 '어딘가 올드하다'는 감각의 정체가 이것이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 휴민트 누적 관객 약 200만 명 기록).

    류승완 감독은 인터뷰에서 "완성도만 놓고 보면 이번처럼 마음껏 해본 적이 없다"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솔직히 그 말이 좀 슬프게 들렸습니다. 감독 본인의 만족과 관객이 받는 경험이 이렇게 어긋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 같았습니다.

    요약: 분노의 방향이 흩어지고 고전적 연출 문법이 현대 첩보 서사와 충돌하면서, 류승완 감독 영화 특유의 뜨거운 에너지가 이번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휴민트가 넷플릭스 글로벌 1위를 했는데 그럼 성공한 영화 아닌가요?

    A. 스트리밍 역주행과 극장 흥행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휴민트는 230억 원이 투입된 작품인데 극장 누적 관객이 약 200만 명에 그쳤습니다. 넷플릭스 1위는 이야기의 대중적 소구력을 증명하지만, 동시에 관객들이 굳이 극장에서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보여주는 셈입니다. 두 가지가 함께 사실일 수 있습니다.

     

    Q. 배우들 연기는 어떤가요? 그것도 별로였나요?

    A. 오히려 반대입니다. 박정민의 연기는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시나리오가 캐릭터에게 충분한 무게를 주지 않았음에도 그 감정의 흔들림을 설득력 있게 소화해냈습니다. 조인성 역시 도덕적으로 흠 없는 조 과장을 안정적으로 끌고 갔습니다. 문제는 연기가 아니라 그 연기를 담은 서사의 구조입니다.

     

    Q.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수준인가요?

    A. 완성도 자체는 결코 낮지 않습니다. 스플릿 디옵터나 디졸브 편집 같은 류승완 감독 특유의 시그니처 연출이 화면 곳곳에서 여전히 세련되게 살아 있습니다. 다만 부당거래, 베테랑, 모가디슈처럼 분노나 감동이 선명하게 관통하는 영화들과 비교하면 무게감이 덜하다는 게 솔직한 평가입니다. 제 점수는 10점 만점에 5점입니다.

     

    Q. 첩보 영화에서 주인공이 착해선 안 되는 건가요?

    A. 착한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영화가 내세운 전제와 어긋난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간을 정보 자산으로 운영하는 냉혹한 세계를 전제로 내건 영화에서, 주인공이 처음부터 그 논리 밖에 있다면 갈등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갈등이 없으면 영화가 밋밋해지는 건 장르를 불문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결론

    정리하면 휴민트는 세 가지를 놓쳤습니다. HUMINT라는 제목이 약속한 장르적 긴장감, 박건이라는 캐릭터가 가졌어야 할 구조적 무게, 그리고 류승완 감독 영화를 류승완 영화답게 만들던 선명한 분노.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빠지면서 잘 만든 영화이지만 차가운 영화가 됐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뜨거워야 합니다.

    제가 기대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다시 한번 류승완 감독이 무언가에 뚜렷하게 분노하는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 그 분노가 돌아온다면, 극장에서 보고 집에 오는 길 풍경이 기억나지 않는 영화, 그런 영화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8hPqTBwJZ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