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이 주인공이 되면 이야기는 더 깊어질까요? 영화 '원더'에서 어기를 괴롭히던 줄리안이 이번엔 할머니의 입을 빌려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제가 원더를 처음 봤을 때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있어서, 그 세계관을 잇는 작품이라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화이트 버드는 제 기대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원더 세계관이 이어진 방식, 생각보다 훨씬 정교했습니다
원더의 세계관을 단순히 '같은 학교 이야기'로 이어갔다면 솔직히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화이트 버드는 전혀 다른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어기를 괴롭히다 전학을 간 줄리안이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저는 이상하게도 그에게 연민을 느꼈습니다. 괴롭히던 아이가 이번엔 외톨이가 됐다는 구도, 그 작은 반전 하나가 이야기 전체의 온도를 바꿔 놓더라고요.
이 영화의 원작은 R.J. 팔라시오의 소설 '아름다운 아이 줄리안'입니다. 팔라시오는 원더에서 미처 다 풀지 못했던 줄리안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이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그 매개가 바로 할머니의 회고담, 즉 플래시백(flashback) 서사 구조입니다. 플래시백이란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보여주는 서술 기법으로, 현재의 인물이 과거를 통해 변화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화이트 버드는 이 구조를 아주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줄리안의 할머니 사라가 꺼내 놓는 건 단순한 추억담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1942년의 기억, 나치 점령기(Nazi occupation) 프랑스에서 살아남은 이야기입니다. 나치 점령기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군사적으로 지배하던 시기로, 프랑스 북부는 독일 군정 하에, 남부는 친독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 아래 놓였던 시대를 말합니다. 제가 이 배경을 접한 순간, 이건 단순한 성장 영화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 원작: R.J. 팔라시오의 소설 '아름다운 아이 줄리안' (원더 세계관 공유)
- 서사 구조: 현재의 줄리안 ↔ 할머니 사라의 1942년 플래시백 교차
- 배경: 나치 점령기 프랑스, 비시 정부 치하의 반유대주의 정책
- 핵심 주제: 혐오와 배척을 이기는 인류애와 다정함
나치 점령기 속 소년의 용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사라 할머니의 회상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부유한 의사 가정에서 공주처럼 자라던 소녀 사라가 어느 날 학교에 들이닥친 독일군을 피해 도망치던 그 장면, 숨을 참고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사라에게 손을 내밀었던 건 소아마비(poliomyelitis) 장애가 있는 소년 줄리앙이었습니다. 소아마비란 폴리오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 근육 마비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당시에는 치료법이 없어 목발이나 보조기구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줄리앙은 바로 그 몸으로 항상 따돌림과 멸시를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자신도 차별받는 처지이면서 유대인 소녀를 숨겨줍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약자가 약자를 구한다는 설정이 너무 이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영화는 줄리앙의 두려움과 망설임도 함께 보여줘서 오히려 더 진실되게 다가왔습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팽배하던 시대, 즉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존 자체가 위협받던 그 상황에서 누군가를 숨겨준다는 건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편견·차별을 뜻하며, 나치 독일은 이를 국가 정책으로 삼아 수백만 명을 학살한 역사적 비극의 핵심 이념이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요즘 뉴스에서 보이는 혐오 범죄들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어둠은 나치 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영화의 메시지가, 극장 밖 현실과 너무 정확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SHMM)에 따르면 나치 정권 하에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이 시기 민간인의 저항과 구조 행위는 극히 드물고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아동권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화이트 버드가 제11회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 경우엔 '당연한 선택이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전쟁과 아동 특별전이라는 섹션 이름만 봐도 이 영화가 왜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 바로 납득이 됩니다.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는 아동 권리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별하는 영화제로, 단순한 상업적 흥행보다 교육적 가치와 사회적 메시지에 집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목적 지향적 영화제들이 오히려 작품 하나하나의 밀도가 훨씬 높더라고요. 이번 11회 영화제는 2025년 디즈니 특별전과 배리어 프리(barrier-free) 협업으로 더욱 풍성해졌다고 합니다. 배리어 프리 영화란 시각·청각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관객이 영화를 동등하게 즐길 수 있도록 화면 해설과 자막을 추가한 형식을 말합니다. 저는 배리어 프리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화면의 모든 장면을 언어로 묘사하는 내레이션이 마치 문학 작품 같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경험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이번 영화제에는 GV(Guest Visit, 감독·배우와의 관객 대화) 프로그램도 알차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GV란 영화 상영 후 제작진이나 배우가 직접 관객과 질의응답을 나누는 자리로, 영화 한 편을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입니다. 개막작 화이트 버드 GV에는 배우 문소리가 참여하고, 11월 8일에는 윤단비 감독이 '토리와 로키타' GV에 함께합니다. 윤단비 감독의 작품을 전부 챙겨봤던 저로서는 이 GV가 특히 기대됩니다. 11월 2일 상영되는 디즈니 특별 초청작 '엘리오'에서는 뇌과학자 정재승 선생님의 참여도 눈에 띄고요.
출처: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에 따르면 이번 영화제는 비극적 현실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아동의 꿈과 희망을 함께 목격하는 자리를 지향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화이트 버드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도 바로 그 이유일 겁니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면서도 다정함으로 저항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화이트 버드를 보려면 원더를 먼저 봐야 하나요?
A. 원더를 먼저 보면 줄리안이라는 인물에 대한 맥락이 생겨 감동이 배가됩니다. 다만 화이트 버드 자체도 독립적으로 완결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원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충분히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제 경우엔 원더를 먼저 봤기 때문에 줄리안의 변화가 훨씬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Q. 아이와 함께 보기에 너무 무겁거나 잔인하지 않나요?
A. 나치 점령기라는 배경이 있어 전쟁의 무게감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전시하기보다 소년 소녀의 우정과 희망을 중심에 놓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가 부모와 아이가 함께 관람하기 좋은 개막작으로 선정했다는 점 자체가 이 영화의 온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Q.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는 언제, 어디서 열리나요?
A. 제11회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는 2025년 11월 2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11월 주말에 걸쳐 진행됩니다. 정확한 상영 일정과 장소는 세이브더칠드런 코리아 공식 채널을 통해 확인하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개막작 화이트 버드 GV에는 배우 문소리가 참여할 예정입니다.
Q. 배리어 프리 영화는 일반 관람객도 볼 수 있나요?
A. 네, 배리어 프리 영화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습니다. 화면 해설 내레이션이 추가되기 때문에 처음엔 낯설 수 있지만, 직접 겪어보니 오히려 영화를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같은 영화를 보는 경험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결론
화이트 버드는 원더의 세계관 위에 세워진 작품이지만, 그 무게와 깊이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제가 극장을 나오면서 오래도록 멍하니 앉아 있었던 건, 1942년의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혐오는 언제나 빛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그 어둠을 밀어내는 건 결국 다정함이라는 단순하지만 절실한 진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증명합니다.
제11회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영화제 개막작으로 이 영화가 선정된 것은, 지금 이 시대에 아이들과 함께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합니다. 11월 영화제 기간에 아이와 함께, 혹은 혼자서라도 한 번 찾아가 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이번 영화제에는 꼭 찾아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