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를 잘 모르는 친구한테 이 영화 추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했습니다. 기대치를 한껏 낮추고 들어간 극장에서도 아쉬움을 가득 안고 나온 관람이었거든요. 샘 윌슨이 방패를 든 첫 단독 영화라는 설레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집에 돌아와 윈터 솔져를 다시 꺼내 보며 전성기를 추억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마블 영화를 보려면 도대체 몇 편을 봐야 할까요 — 진입장벽 문제
슈퍼히어로 영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자신 없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2008년작 인크레더블 헐크를 봐야 합니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즉 마블 스튜디오가 구축한 하나의 거대한 공유 세계관 안에서 탄생한 작품들의 집합체 중 하나인데, 문제는 이 영화를 MCU 소속으로 기억하는 관객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주연 배우가 마크 러팔로도 아닌 에드워드 노튼이었고, 국내 관객 수는 100만 명에도 한참 못 미쳤으니까요.
제가 직접 이 영화를 극장에서 봤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 시절엔 그냥 헐크 단편 영화 정도로 인식했습니다. 그 작품이 17년 뒤 브레이브 뉴 월드의 핵심 전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샘 윌슨이라는 캐릭터를 파악하려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어벤져스: 엔드게임,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팔콘과 윈터 솔져까지 챙겨봐야 맥락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봐야 할 작품이 최소 다섯 편에서 순식간에 여덟 편으로 불어나는 구조입니다. 이건 마치 미국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수십 년에 걸쳐 복잡하게 쌓인 설정 때문에 신규 독자가 "1권부터 시작"을 할 수 없는 상황과 정확히 같은 문제입니다. 실제로 출처: Diamond Comic Distributors 등의 코믹스 유통 업계 자료를 보면, 북미 슈퍼히어로 코믹스 판매량은 수년째 하락세를 보이고 있으며 신규 독자 유입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 인크레더블 헐크(2008) — 브레이브 뉴 월드의 핵심 설정 연결고리
-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 샘이 방패를 처음 건네받는 맥락
- 어벤져스: 엔드게임 — 스티브 로저스의 공식 은퇴와 승계 장면
- 팔콘과 윈터 솔져(D+ 드라마) — 샘이 캡틴 아메리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
이 목록을 보여주면서 친구한테 "그냥 보면 돼"라고 말하기가 참 어렵더라고요. 재밌으니까 보러 가자는 말이 목구멍 아래에서 멈춰버리는 느낌,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 답답함을 크게 느꼈습니다.
슈퍼 솔저 혈청 없는 캡틴 아메리카 — 샘 윌슨의 한계와 가능성
팔콘 시절부터 이어진 샘의 공중 액션이 펼쳐질 때만큼은 눈이 즐거웠습니다. 비브라늄 방패를 활용한 전투와 날개를 이용한 비행 전투 장면들은 이 영화만의 확실한 볼거리입니다. 해리슨 포드가 로스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순간엔 "역시 대통령 하면 이 배우지" 하는 반가움도 있었고요.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슈퍼 솔저 혈청(Super Soldier Serum), 즉 스티브 로저스를 초인으로 만든 유전자 강화 약물을 맞지 않은 샘이 과연 슈퍼히어로로서의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슈퍼 솔저 혈청이란 인체의 모든 신체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혈청으로, 스티브 로저스가 이것을 맞은 뒤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탱크에 부딪혀도 일어서는 장면들이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의 상징적인 액션이 됐습니다.
샘은 그게 없습니다. 올림픽 엘리트 스포츠 선수 수준의 피지컬을 가졌을 뿐, 총에 맞으면 죽고 칼에 찔려도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화 중반, 슈퍼 솔저인 이사야가 창문을 깨고 훌쩍 뛰어내리는데 샘은 계단으로 내려가야 하는 장면에서 저는 실소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스티브 로저스였다면 무조건 뛰어내렸겠지, 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올랐거든요.
슈퍼히어로 영화가 주는 대리만족(vicarious satisfaction), 즉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화면 속 인물이 대신 해주는 쾌감이 이 영화에서는 유독 옅게 느껴졌습니다. 샘이 "나도 슈퍼 솔저 혈청 맞을 걸 그랬나"라고 코믹하게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웃음이 아니라 답답함을 느꼈어요. 그 설정을 개그 소재로 쓸 게 아니라, 아예 다음 편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파워업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아이언맨도 슈트를 계속 개량했고, 블랙 팬서도 비브라늄 슈트를 진화시켰잖아요.
레드 헐크와 각본의 실수 — 긴장감을 스스로 무너뜨린 방식
레드 헐크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오랜 마블 팬으로서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붉게 물든 해리슨 포드가 백악관을 부수며 날뛰는 비주얼은 예고편부터 기대를 모은 만큼의 임팩트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기대감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레드 헐크(Red Hulk)란 로스 대통령이 감마선(Gamma Radiation), 즉 방사성 에너지를 인체에 흡수해 변환된 형태로, 녹색 헐크와 동급의 괴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 설정을 생각하면 샘이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어벤져스 1편에서 헐크가 등장하자마자 블랙 위도우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다른 히어로들이 속수무책인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그게 헐크의 정확한 위력치입니다.
제가 직접 극장 좌석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은, "샘이 도대체 어떻게 이기려는 거지"가 아니라 "이기면 이건 납득이 안 된다"였습니다. 기대가 아니라 불안이 먼저 왔다는 건, 이미 각본이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죠.
그리고 실제로 결말에서 샘의 말 몇 마디에 레드 헐크가 제정신으로 돌아옵니다. 헐크를 진정시키기 위해 MCU가 그동안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생각하면, 이건 너무 가볍게 처리한 장면입니다. 블랙 위도우는 특별한 자장가와 손동작을 써서 겨우겨우 헐크를 달랬는데, 샘은 몇 마디로 끝냅니다. 출처: Box Office Mojo에 따르면 브레이브 뉴 월드의 전 세계 흥행 수익은 약 3억 4천만 달러 수준으로,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진 4억 달러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이 숫자가 각본의 아쉬움과 무관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습니다. 샘이 레드 헐크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상대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장면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요. 그 처절한 분투 속에서 오히려 "슈퍼 솔저 혈청 없는 캡틴 아메리카"의 진짜 의미가 드러날 수 있었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빌런 사무엘 스턴스의 자수 결말, 그리고 멀티버스(Multiverse), 즉 평행하게 존재하는 여러 우주들을 다시 꺼내든 쿠키 장면까지 더하면, 이 영화의 각본은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쉽게 처리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보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나요?
A. 최소한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보고 가시는 게 좋습니다. 샘 윌슨이 방패를 물려받는 과정이 이 두 편에 걸쳐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된다면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팔콘과 윈터 솔져도 보시면 샘이라는 캐릭터를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크레더블 헐크(2008)도 이번 영화의 핵심 설정과 연결되어 있어, 보고 가면 뜬금없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줄어듭니다.
Q. 해리슨 포드 레드 헐크 변신 장면이 볼 만한가요?
A. 비주얼 자체는 임팩트가 있습니다. 붉게 물든 거대한 헐크 형태로 변신하는 장면은 예고편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화면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 이후 전개, 특히 샘과의 대결 방식과 결말이 긴장감을 많이 떨어뜨립니다. 변신 장면 자체는 볼 만하지만, 그 다음이 아쉽다는 점은 감안하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Q. 마블 영화 안 본 사람도 재미있게 볼 수 있나요?
A.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선행 작품 없이 봐도 기본 줄거리 파악은 되지만,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선, 그리고 쿠키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생깁니다. 완전히 처음 마블을 접하신다면 아이언맨(2008)이나 어벤져스(2012)부터 시작하시는 편이 훨씬 즐거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Q. 브레이브 뉴 월드 쿠키 영상은 뭔가요?
A. 쿠키 영상에서는 멀티버스, 즉 평행 우주와 관련된 복선이 등장하며 이후 어벤져스 신작으로 이어질 흐름을 암시합니다. MCU가 멀티버스 사가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신호인데, 캉 다이너스티 계획이 사실상 폐기된 상황과 맞물려 앞으로의 방향이 불투명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결론
마블민국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한 편도 빠짐없이 챙겨본 팬으로서, 이 영화에 10점 만점에 4점 정도를 주고 싶습니다. 극단적으로 재미없지는 않지만, 중하위권을 맴도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리브 타일러가 등장했을 때 인크레더블 헐크를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떠올라 혼자 뭉클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 감정이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서 온 게 아니라 추억에서 온 것이었다는 점이 씁쓸했습니다.
지금 마블을 처음 접하고 싶다면, 이 영화부터 시작하기보다는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처럼 독립적으로도 탄탄하게 완결되는 작품부터 보시길 권합니다. 브레이브 뉴 월드는 마블의 팬이라면 한번 극장에서 확인하되, 기대치는 낮게 조정하고 가시는 게 실망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