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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하사탕 속 거꾸로 달리는 기차 부서진 순수 그리고 시대의 상처

시네씨 2026. 10. 5. 10:14

목차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2000년 새해 첫날 개봉해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구조를 가진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영화입니다. 설경구가 연기한 김영호라는 한 남자의 20년을, 마지막 순간에서 시작해 첫 만남의 순간까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 줍니다. 한 개인의 몰락을 따라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1980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겹겹이 새겨져 있습니다. 거꾸로 달리는 기차, 부서진 순수, 그리고 시대의 상처라는 세 갈래로 이 작품을 읽어 봅니다.

    거꾸로 달리는 기차, 역순 구조의 힘

    영화는 1999년 봄, 오래전 공장 동료들이 모인 강변 야유회에서 시작합니다. 초대받지도 않은 영호가 비틀거리며 나타나고, 철교 위에 올라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합니다. 관객은 이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무너졌는지 모르는 채로 그의 마지막을 먼저 목격하게 됩니다. 이후 영화는 1999년의 사흘 전, 1994년, 1987년, 1984년, 1980년을 거쳐 1979년 가을까지 일곱 개의 장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장과 장 사이에는 철로 위를 거꾸로 달리는 기차의 시점 화면이 놓입니다. 길가의 사람과 차들까지 뒷걸음질 치는 이 화면은 영호의 절규에 대한 영화의 대답처럼 보입니다. 현실에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영화라는 장치만이 되감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반복되는 기차 화면에 쓸쓸한 위로와 냉정한 거리감을 동시에 부여합니다.

    이 역순 구조는 단순한 형식 실험이 아닙니다. 보통의 이야기라면 결말이 궁금해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지만, 박하사탕의 관객은 이미 결말을 알기에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묻게 됩니다. 장면이 거슬러 올라갈수록 영호는 덜 잔인해지고, 덜 냉소적이 되며, 점점 더 앳된 얼굴로 돌아갑니다. 관객은 한 사람이 망가져 가는 과정을 보는 대신 망가진 껍질을 한 겹씩 벗겨 내며 그 안에 숨어 있던 원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말을 먼저 보여 주었기에 오히려 처음으로 돌아가는 여정 하나하나가 비극이 되는 독특한 경험이 여기서 만들어집니다. 각 장에는 앞선 장에서 스쳐 지나간 물건이나 말버릇, 몸의 습관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며 뜻을 얻는 순간들이 숨어 있어서,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연결이 눈에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부서진 순수, 박하사탕과 첫사랑

    제목인 박하사탕은 영호의 첫사랑 순임과 이어진 기억의 물건입니다. 문소리가 연기한 순임은 공장에서 일하며 박하사탕을 싸던 여성으로, 영호가 군대에 있을 때 편지와 함께 사탕을 보내곤 했습니다. 하얗고 작은 박하사탕은 이 영화에서 아직 아무것도 더럽혀지지 않은 시절의 맛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영화가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 주는 영호는 그 사탕을 받을 자격을 하나씩 잃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임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일부러 차갑게 밀어내고,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법 대신 상처를 주는 법을 익혀 갑니다. 설경구는 이 변화를 장마다 다른 걸음걸이와 목소리로 표현하는데,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한 인물인데도 장이 바뀔 때마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그 간극이 큽니다. 그 간극이 곧 영호가 잃어버린 시간의 크기입니다.

    특히 1999년의 장에서 영호가 병상에 누운 순임을 찾아가는 장면은 영화 전체의 감정이 응축된 순간입니다. 의식이 흐린 순임 앞에서 그는 박하사탕 한 봉지를 내밀며 처음으로 무너진 얼굴을 보입니다. 이미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그도, 관객도 알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지나고 영화가 과거로 되돌아갈수록, 우리는 영호가 잃어버린 것이 단지 한 여성이 아니라 사탕처럼 맑았던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순수는 한 번에 깨지지 않고 아주 작은 선택들이 모여 조금씩 부서진다는 점을 영화는 끈질기게 보여 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첫사랑 이야기는 달콤한 회상이 아니라, 지키지 못한 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고통스러운 대면에 가깝습니다.

    시대의 상처, 한 개인에 새겨진 역사

    영호를 바꾸어 놓은 가장 깊은 원인은 개인의 나약함만이 아닙니다. 1980년 5월의 장에서 갓 입대한 영호는 광주로 투입된 진압군 병사로 등장하고, 혼란 속에서 의도치 않게 한 소녀에게 총을 쏘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의 다리는 비가 오면 저려 오고, 이 통증은 이후의 모든 장에서 그를 따라다닙니다. 1987년에는 형사가 되어 대학생을 고문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고, 1999년에는 외환위기의 여파 속에서 사업과 가정을 모두 잃은 채 권총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 연표가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연표와 겹쳐지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영화는 영호를 피해자로만 그리지도, 가해자로만 그리지도 않습니다. 국가 폭력에 떠밀려 첫 상처를 입은 사람이 이번에는 그 폭력의 손이 되어 다른 이에게 상처를 옮기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 줄 뿐이며, 그 냉정한 시선이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남깁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은 1979년 가을, 처음 만난 젊은이들이 같은 강변으로 소풍을 온 장면입니다. 철교 아래 풀밭에 누운 스무 살의 영호는 어딘가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립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모르는 청년의 눈물은, 이미 모든 것을 본 관객에게 견디기 힘든 무게로 다가옵니다. 박하사탕은 한 남자를 망가뜨린 것이 그 자신만이 아니라 폭력의 시대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대가 개인의 몸과 마음에 남긴 상처는 결코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영화입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외침이 지금도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같은 말을 삼켜 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