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영화라는 말만 들어도 피로감이 밀려오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썬더볼츠는 그 피로감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날려버렸습니다. 초능력 없는 루저들의 모임이라는 설정이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고, 보이드(Void)라는 개념으로 풀어낸 자기혐오와 위로의 메시지는 히어로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깊이였습니다.

기대치를 바닥까지 낮추고 들어간 극장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저는 거의 의무감으로 극장을 찾았습니다. 앤트맨 3가 양자 세계(Quantum Realm)를 들먹이며 흥미를 잃게 만들었고, 이터널스는 우주적 스케일을 내세우다가 관객과의 접점을 완전히 놓쳤습니다. 여기서 양자 세계란 극미세 차원의 공간을 뜻하는 마블 세계관의 설정인데, 쉽게 말해 이야기가 커질수록 왜인지 공허해지는 그 느낌을 계속 반복했다는 겁니다.
썬더볼츠의 캐치프레이즈도 썩 설레지 않았습니다. '초능력 없는 히어로들의 모임'이라니, 윈터 솔저(Winter Soldier)조차 어벤져스 내에서는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 정도로 인식되는 판인데 나머지 멤버들은 말할 것도 없었죠. 옐레나, 고스트, 존 워커, 레드 가디언. 이름만 들어도 어딘가 어정쩡한 느낌이 드는 조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예감이 달랐습니다. 매일 똑같은 암살 임무를 반복하며 지쳐가는 옐레나의 모습이 화면에 펼쳐지는 순간, 저는 '이건 히어로 이야기가 아니라 번아웃 이야기구나'라고 느꼈습니다. 플로렌스 퓨가 표정 하나로 전달하는 그 지침의 감각이, 제가 직접 느껴본 무기력감과 너무 비슷해서 묘하게 몰입이 됐습니다.
- 앤트맨 3, 이터널스 등 최근 마블의 연이은 실망이 기대치를 극도로 낮춘 상태
- 인지도 낮은 멤버 구성으로 흥행 전망도 어두웠던 작품
- 그러나 첫 장면부터 '히어로물'이 아닌 '사람 이야기'임을 암시
캐릭터가 살아 있어야 영화가 산다
이 영화가 진짜 물건이라는 확신이 든 장면이 있습니다. 태스크마스터가 퇴장하고 남은 네 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좁은 통로를 으쌰으쌰 기어오르며 투덜대는 장면입니다. 어떤 히어로 영화에서 이런 꼴사나운 탈출 씬을 본 적이 있었나 싶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웃음이 터지면서도 이상하게 짠했습니다. 저들이 루저라는 게 아니라, 저들이 너무 사람 같다는 이유에서요.
존 워커 캐릭터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2대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라는 타이틀을 잠깐 달았던 인물인데, 여기서 2대 캡틴이란 스티브 로저스 이후 공식적으로 그 방패를 이어받은 캐릭터를 의미합니다. 스티브의 고결함이 극단화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존 워커가 보여준다는 분석이 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정의에 대한 집착이 폭력성으로 번지는 그 경계를 배우가 섬세하게 잡아냈고, 보는 내내 저는 진심으로 저 사람이 재수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잘 만든 캐릭터의 증거죠.
그리고 밥, 즉 센트리(Sentry)입니다. 센트리란 마블 코믹스에서 태양 수준의 에너지를 다루는 초월적 존재로, 내면의 어둠인 보이드(Void)와 항상 공존하는 이중적 캐릭터입니다. 영화는 이 설정을 기가 막히게 활용했습니다. 평범한 남자 밥이 압도적인 힘을 얻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허세를 부리고, 민망한 코스튬을 입고 나타나고, 그러다 결국 자신 안의 어둠에 무너질 뻔하는 그 과정이 전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인물 묘사는 원작 팬덤이 없으면 설득하기 어려운 캐릭터인데, 이 영화는 해냈습니다.
디테일도 좋았습니다. 버키가 멤버들을 제압할 때 슈퍼 솔저인 존 워커와 레드 가디언만 철근으로 묶는 장면이 있습니다. 슈퍼 솔저 혈청(Super-Soldier Serum)을 맞은 이들은 일반적인 결박으로는 제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슈퍼 솔저 혈청이란 인체 능력을 수십 배 향상시키는 마블 세계관의 강화 약물로, 캡틴 아메리카가 대표적인 수혜자입니다. 이 작은 설정 하나가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각인시킵니다.
뉴 어벤져스의 탄생, 그리고 마블의 가능성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저는 예상치 못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센트리가 보이드에 잠식당해 뉴욕을 집어삼키려는 순간, 썬더볼츠 멤버들이 힘이 아니라 포옹으로 밥을 붙잡는 장면입니다. 보이드를 주먹으로 때릴수록 오히려 잠식이 심해지는 구조, 즉 자기 안의 어둠을 부정하고 공격할수록 오히려 그것에 지배당한다는 메시지는 히어로 영화에서 이 정도 깊이로 다뤄진 적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수용전념치료(ACT, 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의 핵심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T란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아가는 치료 접근법입니다. 밥이 보이드를 이기는 방법이 싸움이 아닌 수용과 연대였다는 결말은, 이 개념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장면이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마지막 장면, 발렌티나가 기자들 앞에서 '뉴 어벤져스(New Avengers)'를 소개하는 순간은 아이언맨 1편의 "I am Iron Man" 장면을 정확히 오마주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이 히어로의 공식이던 세계에서 토니 스타크가 그 공식을 깼던 것처럼, 이번엔 찌질하고 불완전한 실패자들이 당당하게 카메라 앞에 서는 거죠. MCU(Marvel Cinematic Universe), 즉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전체의 역사를 관통하는 연출이라 저는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출처: Marvel Official).
흥행은 아쉬웠습니다. 특히 국내에서는 관심 자체가 낮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마블이 지금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 이후로 마블 최상위권을 논할 수 있는 작품이 나왔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마블 영화 10점 만점 기준으로 8점은 충분히 줄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썬더볼츠 앞선 마블 드라마 안 봐도 이해할 수 있나요?
A. 핵심 줄거리 이해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옐레나와 발렌티나의 관계, 존 워커의 배경을 알면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지만, 영화 자체가 캐릭터 소개를 자연스럽게 녹여냈기 때문에 처음 보는 분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Q. 센트리가 너무 강한데 이후 마블에서 어떻게 활용될까요?
A. 보이드라는 내부 제약 장치가 있기 때문에 마음껏 쓸 수 없다는 설정이 이미 깔려 있습니다. 이 리미트가 앞으로 얼마나 창의적으로 활용될지가 관건인데, 오히려 그 제약이 센트리를 더 흥미로운 카드로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Q. 마블 영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썬더볼츠도 그냥 패스해도 될까요?
A. 저도 최근 마블 영화에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썬더볼츠는 히어로물보다 인간 드라마에 가깝기 때문에, 마블을 싫어하는 분도 의외로 끝까지 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오면 부담 없이 한 번 시도해볼 만합니다.
Q. 판타스틱 4 쿠키 영상도 있나요?
A. 네, 영화 말미에 판타스틱 4의 등장이 암시됩니다. 판타스틱 4와 닥터 둠은 마블 코믹스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만큼, 향후 빌런 라인업에 닥터 둠이 합류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장치로 보입니다.
결론
썬더볼츠는 제가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확신한 영화입니다. 기대 없이 들어갔다가, 극장을 나서며 마블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 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힘이 아닌 연대와 수용으로 위기를 넘긴다는 이야기는, 히어로 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메시지였습니다.
마블 역대 최상위권이라는 평가가 과하지 않습니다. 지금 극장에서 보기 어렵다면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올 때를 노려보시길 권합니다. 그동안 마블에 실망했던 분일수록 오히려 더 신선하게 느껴질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