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윅 시리즈를 1편부터 4편까지 전부 극장에서 챙겨본 저로서는 스핀오프 소식에 기대 반, 걱정 반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핀오프는 원작의 후광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는데, 제가 직접 보고 나니 그 판단은 절반만 맞았습니다. 초반부의 늘어짐과 후반부의 폭발력이 너무나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였거든요.

존 윅 유니버스 속 발레리나, 세계관은 어떻게 연결되나
이 영화는 존 윅 유니버스(John Wick Universe), 즉 동일한 킬러 사회의 규칙과 조직 체계를 공유하는 세계관 안에 위치합니다. 여기서 존 윅 유니버스란 하이 테이블이라는 킬러 소사이어티 최상위 기구를 중심으로, 콘티넨탈 호텔·루스카 로마 같은 조직들이 얽혀 돌아가는 범죄 사회 전체를 가리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보니 타임라인이 꽤 까다로운데, 존 윅의 손가락 절단 여부나 컨시어지 카론의 생존 여부를 기준으로 놓으면 3편과 4편 사이 어딘가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만 그 어딘가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영화 자체도 명확히 규정하지 않습니다.
루스카 로마(Ruska Roma)는 이 영화의 핵심 조직입니다. 러시아 정교회 교회와 전통 극장으로 위장한 암살자 양성 집단인데, 여기서 주인공 이브 마카로가 존 윅의 후배로 길러집니다. 그리고 영화에 새롭게 등장하는 컬트 조직 루스카는 오스트리아 할슈타트 마을 전체가 암살자로 이루어진 폐쇄적 씨족 사회로, 일종의 정교일치(政敎一致) 집단입니다. 정교일치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이 하나로 합쳐진 지배 구조를 뜻하는데, 이 마을에서는 총장이라 불리는 수장이 신앙과 조직을 동시에 통제합니다.
일반적으로 스핀오프 영화는 세계관 설명에 인색하거나, 반대로 너무 많은 걸 욱여넣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발레리나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존 윅과 윈스턴이 직접 등장해 세계관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건 분명히 성의 있는 선택이었고, 60이 넘은 키아누 리브스가 익숙한 그 자세로 서 있는 장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뭉클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브의 성장 서사와 조직 설명이 겹쳐지는 전반부는 복수극(revenge thriller)으로서의 긴장감을 오히려 희석시킵니다. 복수극이란 주인공이 개인적 피해에 대한 응징을 감행하는 서사 구조인데, 이 장르의 생명은 복수라는 감정이 식기 전에 행동으로 이어지는 속도감입니다. 존 윅 1편이 강아지 죽음 이후 곧바로 폭주로 이어졌던 것과 비교하면, 발레리나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본격 복수까지 약 20년의 시간 간격이 있어 관객의 감정 이입이 분산됩니다.
- 존 윅 유니버스: 하이 테이블을 정점으로 한 킬러 사회 전체를 공유하는 세계관
- 루스카 로마: 러시아 정교회 교회로 위장한 암살자 양성 집단, 이브의 성장 배경
- 루스카(할슈타트): 마을 전체가 암살자로 구성된 폐쇄적 컬트 조직, 후반부 주 무대
- 타임라인: 존 윅 3편 이후·4편 이전으로 추정되나 공식 확정 없음
- 복수극으로서 약점: 피해 시점과 복수 행동 사이 20년 간격으로 감정 온도 저하
액션 개성과 팬으로서 극장에서 느낀 것들
할슈타트 마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온도가 됩니다. 제가 직접 앉아서 경험한 전반부의 답답함이 거짓말처럼 걷히면서, 제작진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여기서 터져 나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 액션의 가장 큰 특징은 건 푸(Gun-Fu)와 체술을 섞되, 존 윅과는 의도적으로 다른 결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건 푸란 총기 사격과 근접 격투를 유기적으로 결합한 액션 스타일로, 존 윅 시리즈가 대중화시킨 개념입니다. 그런데 아나 데 아르마스의 이브는 이 건 푸보다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무기 삼는 재기발랄한 근접전을 주로 구사합니다. 식칼, 프라이팬, 접시, 뚝배기. 성룡(Jackie Chan)식 즉흥 무기 활용이라고 표현하면 가장 가깝습니다. 이 접근 방식이 존 윅과의 차별화에는 성공했다고 봅니다.
이 영화의 액션 문법이 버스터 키튼(Buster Keaton)의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제가 인상 깊게 본 지점입니다. 슬랩스틱(Slapstick)이란 신체적 위험이나 과장된 몸동작으로 웃음과 긴장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코미디 기법인데, 이브가 들어간 집 TV에서 버스터 키튼의 영화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우리가 이 유산을 계승합니다라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맥락에서 접시 싸움 장면의 웃음도, 존 윅 4편에서 계단 끝까지 굴러 떨어지는 장면도 이해가 됩니다.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Criterion Collection을 통해 정식 복원판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염방사기와 소방호스가 불과 물로 정면충돌하는 장면은 애니메이션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사로 구현해낸 그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졌습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극장에 온 보람이 충분했습니다. 렌 와이즈먼(Len Wiseman) 감독은 언더월드(Underworld) 시리즈와 다이 하드 4.0(Live Free or Die Hard)에서 증명한 것처럼 어둡고 칙칙한 미장센(mise-en-scène)과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 모든 시각 요소의 배치와 구성을 뜻하며, 이 영화에서도 할슈타트 마을의 음울한 분위기 연출에서 그 강점이 살아납니다. 다만 서사를 길고 장황하게 푸는 고질적 약점이 이번에도 전반부를 발목 잡은 건 아쉬운 대목입니다.
아버지 하비에르가 연막탄 통에서 연막탄을 몇 개 뽑아 쓰는 장면이 영화 초반에 나오고, 후반부에 이브가 그 똑같은 동작으로 수류탄을 꺼내 쓰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조용히 혼자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브가 계승하는 것이 존 윅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이 짧은 반복 동작 하나로 전달한 연출이었습니다. 소소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 사람만 쓸 수 있는 장면이라는 느낌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아나 데 아르마스의 이미지가 강인하기보다 비 맞은 강아지 같다는 지적도 있는데, 제 경험상 그 점이 오히려 이브가 수없이 얻어맞고 구르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서사와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액션 영화 주인공이 반드시 무서운 인상이어야 한다는 공식은 이 영화가 조금 흔들어놨다고 봅니다. 여성 원톱 액션 영화의 흐름과 경향은 Box Office Mojo에서 흥행 데이터로도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존 윅 시리즈를 안 봐도 발레리나를 즐길 수 있나요?
A. 완전히 모르는 상태보다는 존 윅 1편 정도만 보고 가시는 걸 추천합니다. 전설적인 킬러 존 윅의 존재감과 킬러 소사이어티의 규칙 정도만 알면 줄거리 이해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루스카 로마나 윈스턴 같은 인물들이 등장할 때의 반가움은 시리즈를 본 팬이 훨씬 크게 느낍니다.
Q. 발레리나 타임라인이 존 윅 몇 편 이후인가요?
A. 공식적으로 확정된 시점은 없습니다. 존 윅의 손가락 절단 상태를 보면 3편 이후이고, 카론의 등장을 보면 4편 이전이라는 추정이 나옵니다. 제가 직접 장면을 대조해봤을 때 3편과 4편 사이 어딘가, 혹은 별개의 분기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속 편한 해석입니다.
Q. 아나 데 아르마스의 액션이 존 윅이랑 비슷한가요?
A. 의도적으로 다르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존 윅이 총격과 주짓수를 결합한 건 푸 스타일이라면, 이브는 식칼·프라이팬·수류탄 등 손에 잡히는 것을 즉흥적으로 활용하는 근접전 중심입니다. 훨씬 더 많이 얻어맞고 도망가면서 싸우는 방식이라 체감 온도가 다릅니다.
Q. 초반부가 지루하다는 말이 많던데, 어느 정도인가요?
A. 제 경험상 이브의 성장 서사와 조직 설명이 겹치는 전반부는 체감상 꽤 늘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액션 영화 팬들이 서사보다 액션에 집중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영화의 전반부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할슈타트 마을 진입 이후부터는 확실히 다른 영화가 됩니다.
Q. 특별관에서 볼 만한 영화인가요?
A. 총성과 폭파음의 밀도가 높은 후반부를 생각하면 사운드가 좋은 상영관이 유리합니다. 화염방사기와 소방호스 대결 같은 장면은 화면 크기와 음향이 받쳐줄수록 체감 만족도가 올라갑니다. 제 경우엔 일반관에서 봤는데, 돌아오는 길에 특별관으로 볼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결론
집으로 돌아와 존 윅 1편을 다시 꺼내 보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이게 칭찬인지 비판인지 애매하지만, 적어도 이 세계관에 다시 손이 가게 만든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전반부의 늘어짐을 버티고 나면 후반부는 충분히 돈 값을 합니다. 화염방사기 장면 하나만으로도 제 입장에서는 극장에 온 이유가 생겼으니까요.
존 윅 시리즈에 익숙한 팬이라면 즐길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반대로 서사의 완성도를 먼저 따지는 분이라면 전반부에서 인내심을 요구받을 수 있습니다. 정두홍·장윤주의 출연 분량에 대한 기대는 접어두고 가시는 게 좋고, 사운드 좋은 상영관을 선택하시면 후반부 체감 만족도가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