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과 울버린은 개봉 첫 주말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 약 4억 3,8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R등급 영화 오프닝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출처: Box Office Mojo). 숫자만 보면 구세주라는 말이 농담이 아닌 것처럼 보이죠. 저도 개봉일에 극장에 앉아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을 다시 느꼈습니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면서 드는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 영화가 정말 MCU를 구한 걸까요, 아니면 구원의 흉내만 낸 걸까요.

오프닝: 6년 만의 귀환이 남긴 첫인상
데드풀 2가 나온 게 2018년이니, 무려 6년 만의 귀환입니다. 저는 1편과 2편을 모두 극장에서 낄낄거리며 봤던 팬인지라, 이 공백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프닝 시퀀스에서 엔싱크의 'Bye Bye Bye'에 맞춰 칼을 휘두르는 데드풀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래, 이 맛이야"라는 말이 입에서 나왔습니다.
제4의 벽 브레이킹(Fourth Wall Breaking)이라는 데드풀 특유의 장치, 즉 주인공이 관객을 향해 직접 말을 거는 연출이 첫 장면부터 가동됩니다. 여기서 제4의 벽이란 영화·연극에서 관객과 극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뜻하는데, 데드풀은 이 경계를 무너뜨리며 메타 코미디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프닝의 잔혹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B급 액션은 전편의 질감을 고스란히 살려냈고, 저도 해피 호건과의 어벤져스 가입 면접 장면에서는 눈물 날 만큼 웃었습니다.
그리고 노란 슈트를 입은 울버린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017년작 로건으로 완벽하게 작별했다고 생각했던 휴 잭맨을 다시 본다는 게 이렇게 뭉클할 줄은 몰랐거든요. MCU 합류를 위해 노란 슈트로 갈아입은 울버린은 코믹북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인데, 이 설정 변화 자체가 엑스맨 유니버스와 MCU 사이의 어색한 봉합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반갑고, 동시에 약간 낯설었습니다.
보이드: 20세기 폭스에 바치는 헌사, 그리고 균열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설정은 단연 보이드(Void)입니다. 보이드란 시간선(Timeline)이 소멸하면서 그 안의 인물들이 버려지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시간선이란 TVA, 즉 시간 변이 관리국(Time Variance Authority)이 설정한 '승인된 현실의 흐름'을 말하는데, 이 흐름에서 삭제된 존재들이 보이드로 밀려납니다. 결국 보이드는 만들어지지 못했거나 잊혀진 영화들, 즉 20세기 폭스 시절의 실패작과 미완성작들이 쌓여 있는 무덤인 셈입니다.
엘렉트라, 블레이드, 휴먼 토치가 보이드에 있다는 설정은 올드팬에게는 굉장한 선물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에서 이 장면들을 봤을 때, 단순한 카메오 이상의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오메가 레벨 뮤턴트(Omega-Level Mutant)인 카산드라 노바의 등장도 인상적이었는데, 오메가 레벨 뮤턴트란 마블 코믹스에서 능력치가 측정 불가 수준에 이르는 최상위 돌연변이를 가리킵니다. 휴먼 토치의 피부를 단숨에 벗겨내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그러나 보이드에서의 탈출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절대 탈출이 불가능한 공간이라는 설정을 깔아놓고, 그 해결책이 닥터 스트레인지에게서 빼앗은 슬링 링(Sling Ring)이라는 점은 저를 멈추게 했습니다. 슬링 링이란 마법사들이 차원 간 이동 통로인 엘드리치 게이트(Eldritch Gate)를 여는 데 쓰는 도구인데, 보이드라는 절대적 감금 공간을 이 도구 하나로 허무하게 통과해 버리니 보이드에서의 모든 위기감이 한순간에 식어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보이드 설정이 훌륭하다는 시각이 있는 한편, 저는 그 설정이 결말에 이르러 스스로를 허물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탈출 불가라는 규칙을 세워놓고 MCU 기성품 도구로 문을 여는 건, 설정의 무게감을 스스로 깎아내는 선택이었습니다.
- 보이드: 소멸된 시간선의 잔해가 쌓이는 공간, 20세기 폭스 영화들의 상징적 묘지
- 카산드라 노바: 오메가 레벨 뮤턴트, 강력한 염동력·힐링 팩터·텔레파시를 보유한 규격 외 빌런
- 슬링 링: 탈출 불가 설정을 단번에 허문 MCU식 해결책, 보이드의 긴장감을 약화시킨 요인
구세주: 데드풀은 MCU를 구할 수 있었을까
MCU가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위기를 맞이했다는 건 이제 팬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한 이야기입니다. 마블 스튜디오 스스로도 이 위기를 인식하고 있다는 건, 데드풀이 영화 안에서 자학적으로 "요즘 마블이 영 아니지"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영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리하게 문제를 언급했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닙니다(출처: Rotten Tomatoes 기준 비평가 점수 79%, 관객 점수 95%로 평단보다 팬들의 반응이 압도적으로 좋았지만, 이 간극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MCU의 위기 요인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무리한 세대교체로 인한 기존 히어로 공백, 둘째는 멀티버스 사가(Multiverse Saga)에 대한 과도한 의존, 셋째는 높아진 진입 장벽에서 오는 관객 피로감입니다. 멀티버스 사가란 MCU가 엔드게임 이후 설정한 새로운 서사 축으로, 서로 다른 평행 우주가 충돌하는 인커전(Incursion) 위기를 중심 갈등으로 삼는 단계를 말합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라이언 레이놀즈와 휴 잭맨이라는 검증된 배우 파워로 세대교체 실패에 대한 일시적 해답을 보여줬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관객에게 실질적인 차이로 느껴집니다. 두 배우의 케미스트리는 기대 이상이었고, 티격태격하다가 서로의 상처를 건드리는 장면에서는 경쾌함과 뭉클함이 동시에 왔습니다. 그러나 멀티버스 의존도는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100명의 데드풀이 등장하는 전투 장면은 그 자체로 멀티버스를 여전히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방증이고, 진입 장벽도 오히려 높아졌습니다. 엑스맨 영화 전편을 본 사람, MCU를 따라온 사람, 드라마 로키 시리즈까지 챙긴 사람이어야 맥락이 온전히 읽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데드풀과 울버린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시각도 있고 저도 재미 자체는 최근 마블 영화 중 압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MCU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 이 영화가 제시한 실질적인 대안은 없었습니다. 웃으면서 문제를 인정했을 뿐,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데드풀과 울버린, 엑스맨 영화 안 봐도 재밌나요?
A. 모르고 봐도 웃긴 장면들은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다만 보이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엑스맨 세계관에 대한 언급은 폭스 시절 영화를 본 사람일수록 훨씬 크게 와닿습니다. 아는 만큼 더 웃기는 구조이기 때문에, 엑스맨 시리즈를 전혀 모르는 분이라면 일부 장면이 왜 웃긴지 감이 안 올 수도 있습니다.
Q. 로건(2017)을 보고 나서도 울버린이 왜 살아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A. 멀티버스 설정 덕분입니다. 영화 속 울버린은 로건에서 죽은 그 울버린이 아니라, 다른 시간선에서 데려온 버전입니다. 핵심 인물이 사라지면 해당 시간선 자체가 소멸된다는 설정과 연결되어 있어, 이미 로건으로 세상을 떠난 '우리가 아는 울버린'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읽어야 합니다.
Q. 카산드라 노바가 그렇게 강한데 왜 보이드에 갇혀 있었던 건가요?
A. 영화가 이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카산드라 노바가 스스로 탈출하지 않고 보이드에 머물렀던 이유가 불분명해서, 저도 극장에서 이 지점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슬링 링이 있어야 탈출이 가능한 구조라면 그 한계가 더 일찍 설명됐어야 하는데, 영화는 그 설명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습니다.
Q. 데드풀과 울버린이 MCU 정식 편입 이후에도 시리즈가 계속될까요?
A. 라이언 레이놀즈와 마블 스튜디오 측에서 후속작에 대한 명시적인 발표는 아직 없는 상태입니다. 엔딩 구조상 데드풀이 자신의 시간선에 머무는 것으로 정리되어 있어, MCU 본편에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형태가 될지 독립적인 시리즈로 이어질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
데드풀과 울버린에게는 10점 만점에 7점을 주고 싶습니다. 최근 마블 영화 기준으로는 단연 상위권이고, 오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실컷 웃은 것 같은 반가운 관람이었습니다. 오프닝에서 엔딩 크레딧의 엑스맨 메이킹 영상까지, 20세기 폭스 시절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어 극장을 나서며 엑스맨 시리즈를 다시 정주행하고 싶어졌습니다.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구세주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MCU의 위기는 데드풀이 웃으면서 인정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습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MCU가 앓고 있는 병에 일시적인 진통제가 되었을 뿐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나 데드풀 1, 2편처럼 자신만의 서사를 완고하게 지킨 작품들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면, 그것 자체가 이 영화의 의미이자 한계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