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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리뷰 (극단적 평가, 믿음의 함정, 불가지론)

시네씨 2026. 8. 12. 19:40

목차


    솔직히 저는 곡성을 처음 봤을 때 뭘 본 건지 몰랐습니다. 낭종을 둘러싼 화제가 터지면서 나홍진 감독 이름이 다시 떠오르자 오랜만에 다시 틀었는데, 김환희 배우가 이미 성인이 됐다는 사실에 새삼 멈칫했습니다. 그 정도 세월이 흐른 영화를 다시 보면서 제가 처음에 흘려넘겼던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이 영화가 왜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는지 조금씩 납득이 됐습니다.

     

    극단적 평가: 왜 유독 이 영화만 이렇게 갈리나

    이동진 평론가는 10점을 줬고 정성일 평론가는 그해 최악의 영화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봤더니 이처럼 양쪽 끝에서 동시에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도 드문 사례였습니다. 매트릭스도, 신과함께도 대중과 평론가 사이에서 온도 차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6점과 9점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곡성은 다릅니다. 역대 최고와 최악이 동시에 공존합니다.

    저는 이 양극화의 원인이 개봉 연도나 장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핵심은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서사적 모호성(narrative ambiguity)에 있습니다. 서사적 모호성이란 관객이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더라도 논리적 정합성을 완전히 확보할 수 없도록 이야기 구조 자체에 빈틈을 남겨두는 연출 전략을 말합니다. 나홍진은 이 전략을 장치가 아닌 주제로 끌어올렸고, 그 결과 호평하는 쪽도 혹평하는 쪽도 똑같이 "모호한 장면"을 증거로 내밀게 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찬성 측과 반대 측이 동일한 장면을 무기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굿 장면에서 일광과 외지인이 교차 편집되는 대목을 두고, 좋아하는 쪽은 "열린 해석의 가능성"이라 하고 싫어하는 쪽은 "개연성 붕괴"라고 합니다. 같은 장면을 놓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는 이 상황 자체가, 사실 영화가 노린 바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곡성이 단순한 오컬트 스릴러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 이동진: 10점 만점, "무시무시한 걸작"
    • 정성일: 그해 최악의 영화로 혹평
    • 김혜리·송경원 등도 비판적 시각 유지
    • 이동진·박평식은 호평, 김영진·전찬일은 비판
    요약: 곡성의 극단적 평가 차이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 서사적 모호성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다.

     

    믿음의 함정: 종구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것

    제가 두 번째로 봤을 때 가장 크게 달라 보인 것이 종구였습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로 읽혔는데, 다시 보니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판단력을 잃은 채 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외지인의 집에 두 번이나 찾아가면서 경찰로서 밟아야 할 수사 절차를 한 번도 이행하지 않습니다. 사진 확보, 임의동행 요구, 관할 상급기관 보고 같은 기본적인 절차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내내 "다 안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릅니다. 확증 편향이란 자신이 이미 믿고 싶은 결론에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증거는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인지 왜곡을 말합니다. 종구는 목격담 하나를 듣자마자 외지인을 원흉으로 결론 짓고, 이후의 모든 정보를 그 틀에 끼워 맞춥니다. 병원 진단도, 효진이의 말도, 외지인의 해명도 전부 "그래도 저놈이 문제다"는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처리됩니다.

    무명이 던진 "알아야 믿을 거 아니냐"에 대한 종구의 반응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종구는 자기가 이미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아는 것은 소문과 오해와 공포가 뒤엉킨 환영에 불과합니다. 외지인이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진단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을 다시 봤을 때 등골이 서늘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건 종구 이야기가 아니라 오해와 프레임에 갇혀 진실에 귀를 닫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포 반응을 연구한 심리학 문헌에 따르면, 불안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사람은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고 그릇된 확신을 택하는 경향이 강해집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종구의 행동은 그 교과서적인 예시입니다. 딸이 아프다는 공포가 빠른 결론을 강제했고, 그 결론이 모든 판단을 오염시켰습니다.

    요약: 종구는 확증 편향의 포로가 된 인물로, 영화는 그를 통해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빠르게 폭주하는지를 보여준다.

     

    불가지론의 결말: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

    곡성의 마지막 장면, 동굴에서 외지인을 만난 이삼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이삼은 외지인에게 "악마가 아니라고 하면 믿고 물러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외지인이 "나는 악마가 아니다"라고 했다면 이삼은 물러났을까요. 아닐 겁니다. 결국 어떤 증거를 보여줘도, 어떤 말을 해도 이미 믿어버린 쪽은 믿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부분입니다.

    철학적으로 이 영화는 불가지론(agnosticism)을 주제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이란 신의 존재나 세계의 궁극적 진리를 인간의 인식으로는 알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영화 안에서 외지인이 악마인지 메시아인지, 무명이 선신인지 원시적 자연신인지, 일광이 단순한 미끼인지 주도적 악인지 어느 것도 확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감독의 실수가 아닙니다. 의도입니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을 끌어오는 것이 다소 거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관측 전까지 입자의 상태는 확정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코펜하겐 해석이란 관측 행위 자체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양자역학의 핵심 이론으로, 쉽게 말해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는다"는 개념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곡성의 외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객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는 악마가 되기도 하고 메시아가 되기도 합니다. 실체는 없고, 인식만 있습니다.

    일광이 언급하는 허주(虛主)라는 단어가 결정적입니다. 허주란 실체 없는 귀신, 즉 허깨비를 섬기는 무속 개념입니다. 이 영화에서 상징이니 메타포니 하며 쫓는 모든 것이 결국 허주입니다. 저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제가 찾아낸 "해석"이 또 하나의 허깨비일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이 의미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고, 반대로 그것 자체가 기만에 놀아나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전자에 가깝게 기웁니다만, 후자도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요약: 곡성은 불가지론과 허주 개념을 통해,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인식 한계 자체를 영화의 본론으로 삼는다.

     

    자주 묻는 질문

    Q. 곡성에서 외지인은 결국 악마인가요, 신인가요?

    A. 명확한 정답은 없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직한 답입니다. 악마로 보는 시각도 있고, 메시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는데, 어느 쪽으로 읽든 반드시 설명이 안 되는 장면이 남습니다. 이 불확정성 자체가 영화의 의도이기 때문에 어떤 해석이 "정답"이 되는 순간 오히려 영화의 핵심을 놓치게 될 수 있습니다.

     

    Q. 무명은 선한 존재인가요?

    A. 수호신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원시 신앙에서 신은 선악과 무관하다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혜택을, 믿지 않는 자에게 고통을 주는 원시적 신격으로 해석하면 무명이 선하다기보다는 곡성이라는 공간 자체의 의지를 대변하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제 경우엔 무명을 순수한 선신으로 보기보다는 자연 그 자체의 냉정한 질서 쪽에 가깝게 읽었습니다.

     

    Q. 일광이 굿을 할 때 살을 날린 대상이 외지인인가요, 무명인가요?

    A. 처음 볼 때는 외지인과 대치하는 장면으로 읽히도록 연출됩니다. 그런데 일광의 행동 방식이 외지인의 방식과 유사하고, 그가 장승에 말뚝을 박는 장면을 고려하면 실제 공격 대상이 무명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느냐에 따라 일광의 역할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이것이 일광이라는 캐릭터를 "살아있는 미끼"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Q. 곡성은 결국 좋은 영화인가요, 나쁜 영화인가요?

    A. 명작이라기보다는 수작이라는 게 제 결론입니다. 7점에서 8점 사이 어딘가로 봅니다. 수습이 안 된 부분이 분명히 있고 장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영화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생각의 여지는 충분히 값어치가 있습니다.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도, 알맹이가 있다는 호평도 각자의 인식에서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결론

    곡성을 다시 보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영화는 정답을 주지 않으며, 그것이 결함이 아니라 설계입니다. 알맹이는 있습니다. 다만 그 알맹이는 외지인의 정체나 무명의 선악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의 속성을 스스로 체험하게 만드는 구조 그 자체입니다. 리뷰를 쓰면서 저도 결국 또 하나의 해석을 늘어놓았고, 그것이 또 다른 허주일 수 있다는 생각을 끝까지 지우지 못했습니다.

    곡성에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면, 찾지 못하는 그 과정이 이미 이 영화를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외지인이 뭘 해도 믿지 않았을 이삼처럼, 우리도 이미 자신만의 결론을 품은 채 스크린을 보고 있었을 테니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BmFUYjee0Rs